1장 돈을 맡긴다는 것의 법적 의미

사람들은 금융을 이야기할 때 자연스럽게 “돈을 맡긴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은행에 돈을 맡기고, 펀드에 돈을 맡기며, 증권사에 돈을 맡긴다고 말한다.
이 말은 일상적으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신뢰, 위임, 관리의 뉘앙스를 동시에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융에서는 이 표현이 매우 위험하다.
같은 말이 전혀 다른 법적 행위를 가리키고,
그 차이가 곧 위험의 성격과 책임의 범위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금융상품을 설명하기 전에,
먼저 이 “맡긴다”는 말을 분해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수익률보다 앞서, 상품명보다 앞서,
금융에서 무엇이 실제로 일어나는지를 판단하기 위한 출발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맡긴다”는 말이 설명을 대신할 때 생기는 문제

일상 언어에서 “맡긴다”는 말은 결과 중심적이다.
상대가 대신 처리해 주고, 나는 그 결과만 받는다는 기대가 포함돼 있다.
그래서 이 말은 편하다. 복잡한 과정을 생략해도 의미가 통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금융에서는 결과보다 관계가 먼저다.
돈을 맡기는 순간,
누가 소유자가 되는지,
누가 책임을 지는지,
문제가 생기면 누가 어떤 권리를 갖는지가 정해진다.
“맡겼다”는 표현은 이 모든 과정을 한 단어로 덮어버린다.
그 결과, 금융상품은 비슷해 보이고,
위험은 추상적인 것이 되며,
문제가 발생했을 때 원인을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돈을 맡길 때 성립하는 세 가지 법적 관계

금융에서 돈을 맡길 때 성립하는 관계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이 구분은 이후 등장하는 모든 금융상품을 분류하는 기준이 된다.
첫째는 대여 관계다.
대표적인 예가 은행 예금이다.
예금을 하면 돈의 소유권은 은행으로 넘어간다.
나는 은행에 대해 같은 금액을 돌려받을 권리를 갖게 된다.
즉, 예금은 보관이 아니라 대여에 가깝다.
은행은 그 돈을 활용할 수 있고,
나는 은행이 약속을 지킬 것이라는 전제 아래 채권자의 지위에 선다.
계좌에 찍힌 숫자는
내 돈이 그대로 보관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라,
은행에 대한 청구권의 표시다.
둘째는 위임·신탁 관계다.
펀드와 자산운용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 경우 투자자는 자산의 운용 권한을 넘기지만,
자산은 운용사와 분리되어 관리된다.
운용사는 대신 굴려줄 뿐이다.
성과를 보장하지 않으며,
손실이 발생해도 대신 책임지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돈을 맡겼다는 느낌과 달리
위험은 여전히 투자자에게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셋째는 중개 관계다.
증권사가 여기에 해당한다.
증권사는 돈이나 자산을 대신 소유하지 않는다.
거래를 연결해 주고,
그 과정에서 수수료를 받는다.
중개자는 위험의 주체가 아니다.
자산 가격이 오르거나 내려도,
그 결과는 전적으로 투자자의 몫이다.
이 세 관계는 모두 “돈을 맡긴다”는 말로 표현될 수 있지만,
법적 성질은 전혀 다르다.
그리고 이 차이는,
문제가 생겼을 때 극명하게 드러난다.
“내 돈”이라는 표현이 가리는 것들

금융에서 “내 돈”이라는 표현은 감정적으로는 명확하다.
하지만 법적으로는 항상 불완전하다.
예금은 내 돈처럼 보이지만,
법적으로는 은행의 부채다.
펀드 자산은 내 몫이지만,
내가 직접 통제하지 않는다.
증권 계좌의 자산은 내 소유지만,
가격 변동의 책임도 내가 전부 진다.
즉, 금융에서는
소유권, 통제권, 위험 부담이 항상 함께 움직이지 않는다.
이 분리가 이해되지 않으면,
사람들은 문제가 생겼을 때
“내 돈인데 왜 이렇게 되느냐”는 질문을 반복하게 된다.
그러나 금융에서는 이 질문 자체가
이미 구조를 놓친 상태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금융회사는 무엇을 대신해주고, 무엇을 대신해주지 않는가

금융회사는 흔히 “대신 해주는 곳”으로 인식된다.
대신 보관해 주고,
대신 굴려주고,
대신 관리해 준다는 이미지다.
하지만 금융회사가 대신해 주는 것은 행위이지, 결과가 아니다.
- 은행은 돈을 받아 관리하고 운용하지만,
파산 시 원금을 보장하는 주체는 아니다. - 운용사는 자산을 대신 운용하지만,
손실을 대신 감당하지 않는다. - 증권사는 거래를 연결해 주지만,
가격 변동의 책임을 나누지 않는다.
이 경계가 흐려질수록,
금융상품은 안전해 보이고,
위험은 멀게 느껴진다.
그러나 실제 위험은
항상 투자자 쪽에 남아 있다.
이 장에서 반드시 고정해야 할 기준
이 장은 금융상품을 고르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는다.
대신, 이후 모든 장에서 사용할 기준을 하나 고정한다.
- “돈을 맡긴다”는 말은 하나의 행위가 아니다.
- 금융상품의 성격은 수익률이 아니라 법적 관계에서 먼저 갈린다.
- 안전함과 위험함은 감정이 아니라 구조의 문제다.
이 기준이 서지 않으면,
ETF 역시
“편한 상품”,
“대신 굴려주는 상품”으로 오해되기 쉽다.
다음 장에서는,
이제 같은 “돈을 맡긴다”는 행위가
예금, 펀드, 증권에서 어떻게 서로 다른 구조로 나뉘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다음 장 예고
2장. 예금, 펀드, 증권의 구조적 차이

